슈말칼덴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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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말칼덴 동맹은 1531년 종교적 권리 보호를 위해 결성된 독일의 개신교 군사 동맹이다. 헤센의 필립 1세와 작센의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지도했으며,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동의하는 국가들이 참여했다. 프랑스와 덴마크와 동맹을 맺고 가톨릭 세력에 대항했으나,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하며 붕괴되었다.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를 통해 루터교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슈말칼덴 동맹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형성된 개신교 제후와 도시들의 군사적, 정치적 연합체이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 루터파의 입지가 위협받고, 가톨릭 측으로부터 교회 재산 반환 요구가 제기되자, 이에 반발한 루터파 제후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 역사적 배경
이러한 배경 아래 1531년 헤센 방백 필립 1세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주도로 튀링겐의 슈말칼덴에서 동맹이 결성되었다. 동맹은 가톨릭 세력의 압박으로부터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고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후 동맹은 세력을 넓혀나갔다.
동맹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황제 카를 5세는 결국 동맹 토벌을 결정했고,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동맹 내부의 의견 불일치와 작센 공 모리츠의 배신으로 동맹이 패배하고 지도자들이 포로로 잡히는 등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후 모리츠가 입장을 바꿔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프랑스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결국 1552년 파사우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파 신앙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는 독일 역사에서 종교적 공존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1. 동맹의 결성과 초기 활동
슈말칼덴 동맹은 1531년 2월 27일 독일 튀링겐 지역의 도시 슈말칼덴에서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1] 동맹의 명칭은 이 도시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압박에 맞서 개신교 제후와 도시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최초의 군사 동맹이었다.
동맹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루터파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제출했지만, 가톨릭 제국 귀족들은 그동안 개신교 제후들이 차지한 교회 재산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집행유예를 조건으로 가톨릭 측의 요구를 인정하자, 재산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개신교 제후들은 황제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되었다.
동맹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개신교 영주였던 헤센 방백 필립 1세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였다.[2] 이들은 황제 카를 5세의 공격이 있을 경우 서로를 방어하기로 약속하며 방어적인 성격의 종교 동맹으로 시작되었다. 작센 선제후의 주장에 따라 동맹 가입 자격은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나 개혁파의 사성 도시 신앙 고백에 동의하는 제후나 도시로 제한되었다.[3]
초기 회원으로는 헤센과 작센 외에 안할트, 브레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마그데부르크, 슈트라스부르크, 울름 등이 있었다. 이후 콘스탄츠 등 다른 도시들도 동맹에 가담했다.
슈말칼덴 동맹은 결성 초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532년에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 5세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결과였다. 1538년에는 덴마크와도 연계하여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다. 동맹 영내에서는 가톨릭 교회 재산을 적극적으로 몰수하고 주교와 가톨릭 귀족들을 추방했으며, 이를 통해 독일 내에서 루터파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2. 2. 뉘른베르크 종교 평화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의 결성과 1532년 4월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1세가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세를 펼치자,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1세(당시 오스트리아 대공)는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의 압박은 페르디난트 1세가 프로테스탄트 측에 종교 평화를 허용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술레이만 1세에게 굴욕적인 제안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1532년 4월 레겐스부르크 국회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요구한 평화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군대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자 결국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1532년 7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최종 논의 끝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4]
이 뉘른베르크 종교 평화를 통해 종교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추후 공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았다. 또한, 별도의 협약에 따라 황제 재판소에 계류 중이던 모든 종교 관련 소송 절차 역시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5]
3. 동맹의 성장과 활동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 이후 가톨릭 제국 귀족들이 루터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에게 과거 교회 재산의 반환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제후들은 1531년 슈말칼덴에서 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압력에 맞서 종교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성격을 띤 최초의 동맹이었다. 동맹의 주요 지도자는 헤센 방백필립 1세와 작센 선제후요한 프리드리히 1세였다. 초창기 회원으로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 만스펠트 백작령,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슈트라스부르크, 울름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콘스탄츠 등 여러 도시가 가담했다.
동맹은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 1532년에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1535년 12월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며 안할트, 뷔르템베르크, 포메라니아와 자유제국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켐프텐이 새롭게 가입했다.[6] 1538년에는 덴마크-노르웨이와 동맹을 맺었으며,[7] 1545년에는 선제후령 팔츠의 프리드리히 3세가 동맹에 합류했다.[7] 동맹 회원들은 상호 방어를 위해 보병 1만 명과 기병 2천 명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9] 이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행동은 피하면서도, 동맹 지역 내에서 가톨릭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주교와 가톨릭 귀족들을 추방하는 등 북부 독일을 중심으로 루터파의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1544년, 프랑스와 크레피 조약을 맺어 프랑스와의 관계를 안정시킨 카를 5세는 슈말칼덴 동맹을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과거 적대 관계였던 교황 파울루스 3세 및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동맹의 핵심 인물인 헤센 방백필립 1세의 사위이자 작센 선제후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인 작센 공 모리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덴마크-노르웨이는 1544년 슈파이어 조약을 통해 크리스티안 3세 통치 기간 동안 제국에 대해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2세 헥토르는 동맹에 제한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전쟁 중에는 오히려 황제에게 기병을 지원했다.[8]
1546년, 슈말칼덴 동맹은 결국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하며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황제군은 여러 전투에서 동맹군을 격파했으며, 1547년 4월 뮐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동맹의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립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열어 루터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규정의 수용을 강요했다.
그러나 황제 편에 섰던 모리츠는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에 불만을 품고 1552년 반기를 들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연합하여 카를 5세가 머물던 인스브루크를 급습했고, 황제는 급히 도피해야 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모리츠와의 평화 협상을 맡겼다. 그 결과 1552년 8월, 파사우 조약이 체결되어 루터파의 신앙이 잠정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파사우 조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군주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영지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lat)는 원칙을 확립하여 종교 개혁 이후 독일 내 종교 갈등을 공식적으로 봉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원도 동맹 세력 회복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1. 루터의 슈말칼덴 조항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537년 회의에서 동맹에 보다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신앙 고백서인 《슈말칼덴 조항(Smalcald Articles)》을 제시할 계획이었다.[10]
루터는 1537년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했으나, 신장결석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 통치자들과 공작들은 루터가 머물던 집에서 회의를 열기도 했다. 루터는 《슈말칼덴 조항(Smalcald Articles)》으로 알려지게 될 신앙 조항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 조항들은 회의 당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후 1580년에 《콘코르디아 신조(Book of Concord)》에 포함되었다.
4. 정치적 환경과 국제 관계
슈말칼덴 동맹은 결성 초기 약 1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 5세의 큰 제약을 받지 않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는 샤를 5세가 당시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은 1526년부터 1571년까지 장기간 지속되며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슈말칼덴 동맹은 외부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1532년에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자국 내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면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샤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하는 이중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또한 1538년에는 덴마크와의 연계에도 성공하며 외교적 입지를 넓혔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점차 변화했다. 샤를 5세는 1544년 프랑스와의 크레피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동맹 지원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10] 또한 1547년에는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과도 아드리아노플 휴전을 체결하여 동부 전선을 안정시켰다. 프랑스와 오스만 제국이라는 외부 위협 요소를 어느 정도 해소한 샤를 5세는 마침내 독일 내부의 슈말칼덴 동맹 문제에 집중할 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곧 슈말칼덴 전쟁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4. 1. 프랑스와의 관계
슈말칼덴 동맹은 결성 후 약 1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 5세의 큰 방해 없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샤를 5세가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은 1526년부터 1571년까지 장기간 이어지고 있었다.1535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자국 내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면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하는 이중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같은 해 샤를 5세가 튀니스 정복을 이끌자, 프랑수아 1세는 술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어진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간의 1536년-1538년 이탈리아 전쟁은 1538년 니스 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술적 지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와 샤를 5세 사이의 마지막 전쟁이었던 1542년-1546년 이탈리아 전쟁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1544년 크레피 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황이 변했다.[10] 이 조약을 통해 프랑수아 1세는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프랑스와의 평화를 확보한 샤를 5세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1547년에는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오스만 제국과도 아드리아노플 휴전을 맺었다. 이를 통해 샤를 5세는 외부의 위협을 잠재우고, 슈말칼덴 동맹과의 본격적인 대결을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4. 2.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슈말칼덴 동맹은 결성 후 약 1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샤를 5세의 큰 방해 없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샤를 5세가 당시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은 1526년부터 1571년까지 장기간 지속되었다.1535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자국 내에서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샤를 5세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을 지원하는 이중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같은 해, 샤를 5세는 튀니스 정복을 이끌며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이에 맞서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술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결성했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1536년-1538년 이탈리아 전쟁은 1538년 니스 휴전으로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 대한 지원은 오래가지 못했다. 1544년, 샤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벌어진 1542년-1546년 이탈리아 전쟁이 크레피 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프랑수아 1세는 슈말칼덴 동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10]
프랑스와의 관계를 정리한 샤를 5세는 이제 내부 문제인 슈말칼덴 동맹에 집중할 여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와 동맹 관계였던 오스만 제국과도 1547년 아드리아노플 휴전을 체결하여 동부 전선을 안정시켰다. 이를 통해 샤를 5세는 슈말칼덴 동맹과의 본격적인 대결을 위한 합스부르크의 군사적, 재정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5. 슈말칼덴 전쟁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1544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압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슈말칼덴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로마 교황 파울루스 3세 및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고, 동맹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작센 공 모리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1546년, 슈말칼덴 동맹이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1546년부터 1547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카를 5세와 그의 동맹군은 슈말칼덴 동맹과 격돌했다. 비록 동맹군의 군사력이 우세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지도부 내 의견 불일치와 무능함으로 인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11] 여기에 동맹의 핵심 인물이었던 작센 공 모리츠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동맹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이끄는 황제군이 동맹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의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와 필립 1세가 포로로 잡히면서[12] 동맹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회의를 열어 루터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규정의 수용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조치는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황제를 도와 동맹을 무너뜨렸던 프로테스탄트 제후 모리츠가 1552년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들고 황제가 머물던 인스브루크를 기습하면서 전세는 다시 뒤바뀌었다. 결국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협상을 맡겼고, 1552년 파사우 조약을 거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가 체결되었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파 신앙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각 지역의 종교는 해당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칙(Cuius regio, eius religiolat)이 확립되었다.
5. 1. 뮐베르크 전투와 동맹의 붕괴

1544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제압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슈말칼덴 동맹과의 결전을 준비하며, 이전에는 적대 관계였던 로마 교황 파울루스 3세 및 바이에른과 동맹을 맺었다. 또한 카를 5세는 동맹의 주요 인물인 헤센 방백 필립의 사위이자 요한 프리드리히의 사촌인 작센 공 모리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1546년, 슈말칼덴 동맹은 결국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하며 슈말칼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1546년부터 1547년까지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카를 5세와 그의 동맹군은 베틴가의 에르네스틴 작센과 알베르틴 작센 영토를 놓고 슈말칼덴 동맹과 싸웠다. 동맹군의 군사력이 우세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지도자들은 무능했고 결정적인 전투 계획에 합의하지 못했다.[11]
전쟁 초기 교황 바오로 3세가 황제군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보조금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 황제 측에 불리한 상황도 있었지만, 1547년 4월 24일 카를 5세가 이끄는 황제군은 뮐베르크 전투에서 동맹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의 지도자인 요한 프리드리히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들이 포로로 잡혔다. 헤센의 필립은 협상을 시도했지만 황제는 이를 거부했고, 필립은 결국 5월에 항복했다.[12] 이 전투는 사실상 카를 5세에게 전쟁의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단 두 개의 도시만이 저항을 계속했다. 이론적으로는 30개 도시의 주민들이 가톨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13] 전쟁의 패배로 마르틴 부서와 같은 많은 제후들과 핵심 개혁가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영국 종교 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슈말칼덴 동맹을 붕괴시킨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제후들과 도시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루터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규정의 수용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은 프로테스탄트였던 모리츠의 불만을 샀다. 결국 1552년 모리츠는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들고 황제가 머물던 인스브루크를 기습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급히 탈출해야 했다. 이후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모리츠와의 평화 협상을 맡겼다.
1552년 8월, 파사우에서 루터파의 신앙을 인정하는 내용의 파사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가 체결되어, 제후가 자신의 영지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영주의 신앙이 영지의 신앙'(Cuius regio, eius religiolat) 원칙이 확립되었다.
6. 전쟁 이후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임시조치(Augsburg Interim)를 통해 패배한 프로테스탄트 측에게 가톨릭 신앙 규범을 강요하며 세력을 억누르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 정책은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한때 황제를 도왔던 모리츠가 1552년 다시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서 반기를 들면서 전세는 급변했다. 모리츠의 군대는 황제가 머물던 인스브루크를 기습했고,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너머로 피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카를 5세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협상을 위임했고, 1552년 8월 파사우 조약(Peace of Passau)이 체결되어 프로테스탄트는 일부 종교적 자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제국 내 종교 통일을 추구했던 카를 5세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왔으며,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 체결의 기초가 되었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교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6. 1.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
슈말칼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동맹군을 격파하고 지도자 요한 프리드리히와 필립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 제후들과 도시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루터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임시조치(Augsburg Interim)의 수용을 강요하며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려 했다.그러나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에 불만을 품은 모리츠는 1552년 카를 5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모리츠는 카를 5세가 머물고 있던 인스브루크를 급습했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너머로 급히 피신해야 했다. 이 사건은 프로테스탄트 측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카를 5세는 동생이자 로마 왕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에게 모리츠와의 평화 협상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52년 8월, 파사우에서 파사우 조약(Peace of Passau)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루터교 신자들의 종교적 자유를 일부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제국 내 종교를 가톨릭으로 통일하려던 카를 5세의 계획은 사실상 좌절되었다.
파사우 조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최종적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Peace of Augsburg)가 체결되었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교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톨릭교와 동등한 공식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누구의 영토, 누구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이 확립되어, 각 영지의 군주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신앙(가톨릭 또는 루터교)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는 제후들의 종교적 자율성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7. 슈말칼덴 동맹 참여 세력
슈말칼덴 동맹은 1531년 2월 27일,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두 개신교 통치자였던 헤센의 필립 1세(Philip I, Landgrave of Hesse)와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John Frederick I, Elector of Saxony)에 의해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1][2] 이 동맹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의 공격에 대비하여 서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적 종교 동맹으로 시작되었다. 작센 선제후의 주장에 따라, 회원 자격은 루터파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Augsburg Confession) 또는 개혁파의 사성 도시 신앙 고백(Tetrapolitan Confession)에 동의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3]
초창기 회원으로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 만스펠트, 마크데부르크, 브레멘, 스트라스부르, 울름 등이 있었다.
1535년 12월, 동맹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서명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안할트, 뷔르템베르크, 포메라니아와 자유제국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켐프텐이 추가로 가입했다.[6]
1538년에는 새롭게 개혁된 덴마크-노르웨이와 동맹을 맺었다. 1545년에는 프리드리히 3세가 통치하던 선제후령 팔츠의 지지를 확보했다.[7]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2세 헥토르로부터는 제한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는 슈말칼덴 전쟁 중 황제에게 기병을 지원하기도 했다.[8]
다음은 슈말칼덴 동맹에 참여했거나 동맹을 맺은 주요 세력들이다.
세력 | 유형 | 비고 |
---|---|---|
헤센 | 방백국 | 창립 멤버, 지도자 (필립 1세) |
작센 | 선제후국 | 창립 멤버, 지도자 (요한 프리드리히 1세)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 공국 | 초기 멤버 |
안할트 | 공국 | 초기 멤버 / 1535년 가입[6] |
만스펠트 | 백국 | 초기 멤버 |
마크데부르크 | 대주교구 (세속화) | 초기 멤버 |
브레멘 | 대주교구 (세속화) / 자유 도시 | 초기 멤버 |
스트라스부르 | 자유제국도시 | 초기 멤버 |
울름 | 자유제국도시 | 초기 멤버 |
뷔르템베르크 | 공국 | 1535년 가입[6] |
포메라니아 | 공국 | 1535년 가입[6] |
아우크스부르크 | 자유제국도시 | 1535년 가입[6] |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 자유제국도시 | 1535년 가입[6] |
켐프텐 | 자유제국도시 | 1535년 가입[6] |
콘스탄츠 | 주교후국 (세속화) / 자유 도시 | |
로이트링겐 | 자유제국도시 | |
메밍겐 | 자유제국도시 | |
린다우 | 자유제국도시 | |
비베라흐 | 자유제국도시 | |
이스니 임 알괴 | 자유제국도시 | |
뤼벡 | 자유 한자 도시 | |
덴마크-노르웨이 | 왕국 | 1538년 동맹 |
선제후령 팔츠 | 선제후국 | 1545년 지지 확보[7] |
8. 평가와 의의
슈말칼덴 동맹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 맞서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취했던 최초의 개신교 제후 동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동맹의 이름은 결성 장소인 독일 슈말칼덴 시에서 유래했다. 비록 동맹 내부의 의견 불일치와 외부 세력의 개입으로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한때 해체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세력을 회복하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독일 내에서 루터교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 개혁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참조
[1]
백과사전
Smalkaldic League
[2]
서적
The Western Heritage
[3]
서적
Christ's Churches Purely Reformed: A Social History of Calvinism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4]
백과사전
Nuremberg
[5]
서적
The Lutheran Cyclopedia
https://books.google[...]
Scribner
[6]
서적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7]
서적
The Age of the Reformation
[8]
서적
Iron Kingdom: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Penguin Group
[9]
웹사이트
The Schmalkaldic League, Part 1: Introduction and Creation
http://europeanhisto[...]
[10]
서적
The Age of the Reformation
[11]
서적
The Age of the Reformation
[12]
서적
A History of Christendom
[13]
서적
A History of Modern Europe, Volume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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